카테고리 없음 2015. 5. 2. 00:30

한경직 목사님은 “착함”의 사람이었습니다한경직 목사님은 말이나 지식으로 설교하고 목회하신 분이 아니라 착한 삶으로 설교하고 목회하신 분입니다조향록 목사님은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것은 말이 설교하는 설교가 아니고 겸손과 기도의 인격이 설교하는 설교이기 때문이라고 정확하게 분석했습니다영락교회의 집사인 이우근 부장판사도 한경직 목사님의 설교는 삶으로 설교하는 설교라고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사자 후 같은 명 설교도 가슴을 쥐어뜯게 하는 감동적인 웅변도 할 줄 모르던 그는 그저 바보처럼 자신의 몸으로 자신의 손과 발로 그렇게 자신의 삶으로 설교하고 선포했을 뿐입니다그는 바보처럼 살다 가셨습니다가장 좋은 옷을 입고 가장 멋진 자동차를 탈 수 있었는데도그는 바보처럼 좋은 옷 대신에 소매가 닳아 빠진 옷을 입었고 멋진 차 대신에 버스를 타거나 남의 차를 빌려 타곤 했습니다가장 안락한 아파트에 살 수 있었는데도바보같이 그것을 마다하고, '월셋방에 사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면서 산꼭대기 20평짜리 교회사택에 들어갔습니다."  

시인 고훈 목사님은 한경직 목사님을 기리며 "가난한 목자사랑의 목자작은 예수"라고 목이 메어 불렀습니다. "한 사람을 만인만큼 소중하게 만인을 한 사람 대하시듯 어떤 요구에도 거절 못하시고 누구의 의견에도 손들어주시고 단 한 사람에게도 섭섭함 주신 일 없으신 한국의 성자여 한국의 작은 예수여모든 것 가지고도 아무것도 없으신 가난한 목자,아무 것도 없으면서 모든 것 다 가지신 사랑의 목자여우리가 오늘 여기 이토록 슬픈 것은 아무리 둘러봐도 당신 같은 목자는 하나도 없는 이 텅 빈 세상이 너무 슬퍼서 입니다."

김용기 장로님은 한경직 목사님의 인격을 높이 존경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뒤에서 욕하고 흉보는 일은 소인배가 하는 일이다또 정부의 잘못이 있을 때 의의 병기를 가지고 강단에서 내려치거나 사회인들이 욕하고 나무랄 때 덩달아 그들의 비위를 맞추어가며 은연중 '나만이 의인이다하는 식의 만용을 피우는 것도 소인배의 즐겨하는 짓들이다그리스도인은 사회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야 할 터인데 그 길은 한경직 목사님이 걸어오신 발자취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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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15. 5. 1. 00:29

한경직 목사님이 1969 8 3일에 행한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는 능력이란 제목의 설교에서 수 많은 사람들의 예를 들면서 약함을 통해서 주어지는 은혜를 간증했습니다한경직 목사님은 한 평생 자기 자신의 약함과 민족의 약함을 절감한 사람인 동시에 그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체험하고 간증한 사람이었습니다. 1972 4 23일에 행한 "약할 때에 강하니라"란 제목의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인간이 약할 때는 흔히 겸손하여 집니다건강하던 이가 중병에 걸려 약해지면 겸손하여 집니다교만은 만죄의 어머니라고 합니다둘째인간이 약하여 질 때에 그 생각이 깊어집니다인생의 깊은 문제를 탐구하게 됩니다셋째우리가 약할 때에 기도를 더하게 됩니다벌써 오래 전에 내가 미국 뉴멕시코주 알바컬키라는 도시에 있던 요양원에 입원하여 있을 때제가 폐가 약하여 약 2년간 입원하고 있었습니다나는 그때에 병석에 고요히 누워서 '약할 때에 강하니라하는 성구를 묵상하는 가운데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여러분약할 그때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납니다사도 바울과 같이 '내가 약할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외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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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15. 4. 30. 00:28

첫째로한경직 목사님은 “약함”의 사람이었습니다한경직 목사님은 젊은 시절부터 한 평생 수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인간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절감한 분이었고 또 자기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무력한 존재임을 체험한 분이었습니다.그는 두려워하고 절망했으며 때로는 넘어지기도 했습니다그러나 그의 연약함이 오히려 그를 진정한 목회자로 만든 비결이었는지도 모릅니다한경직 목사님이 17세 되던 1919년 평양 영성소학교 교사로 봉직하고 있던 때 일본 고등계 형사들의 혹독한 고문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그는 고문 당한 후 두려움과 무서움에 떨었다고 고백했습니다자신의 무력함을 비관하기도 했습니다한경직 목사님이 27세 되던 1929년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하고 예일 대학 박사과정에 진학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때 폐결핵 3기라는 진단을 받고 그는 또 한번 인간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절감했습니다진학은 물론 인생 자체를 포기해야 할 지도 모른다는 절망감과 위기감을 느꼈습니다그는 자신의 의지도 건강도 아무 것도 믿을 것이 되지 못한다는 절망감을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신의주 제이교회와 영락교회의 목회 시절에도 약함을 드러냈고 6.25 전쟁 중에도 약함을 드러냈고 군사독재 시절에도 약함을 드러냈습니다한경직 목사님은 그의 생애의 마지막 2년 동안 노환으로 많은 고난과 약함을 체험했습니다한경직 목사님은 어느 대담에서 괴로운 일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일생을 연약한 몸으로 살아온 것이 제일 괴로움이었지요." 라고 대답한 일이 있습니다마지막 2년 동안 두 다리를 수술하는 고통도 겪었고 말을 잘 하지 못하는 답답함도 당했습니다특히 마지막 6개월 동안은 가래가 너무 끓어서 목에 구멍을 뚫고 지내는 극심한 괴로움도 겪었습니다한 목사님은 저의 손을 붙잡고 "늙는 것이 재미 없어!" 라고 그의 노약의 서글픈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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